Happiness of Life
일산병원이 전하는 인생의 행복

조선왕조 건강실록

타락죽 녹두죽
 쒀서  준다

조선의 임금들은 보통 아침, 저녁을 거하게 먹고 점심은 간단히 먹었으며 매일 3~4회 정도 생물방에서 만든 간식을 먹어 영양분을 보충하였다. 질병에 걸리거나 입맛이 없어 수라를 먹지 못한다면, 죽, 떡, 정과, 차, 화채 등을 챙겨먹었다.

정리. 편집실  참고도서. 역사 선생님도 가르쳐주지 않는 조선왕조 건강실록

조선 임금들의 영양 간식 ‘죽’

죽은 허약해진 옥체가 상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보양 간식으로 제격이었으니, 어의들과 상궁들은 임금의 체질을 미리 파악해서 죽을 대령해야 했다. 평소 몸이 찬 임금에게 찬 성질의 죽을 줬다가 복통, 설사가 발생하거나 몸이 열한 임금에게 뜨거운 성질의 죽을 줬다가 두통이 발생하기라도 한다면 호되게 문책을 당하기 십상이었다. <승정원일기>에는 탕약뿐만 아니라 음식물의 섭취 전후 나타나는 증상의 변화도 기록되어 있어 식품영양학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기록 유산이다. <승정원일기>에서 ‘죽’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해보면, 타락죽(우유죽)이 287건, 녹두죽이 168건, 의이죽(율무죽)이 29건 순으로 가장 많이 나타난다. 그럼 왕들이 가장 사랑했던 타락죽과 녹두죽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타락죽, 내의원에서 직접 대령한 귀한 약선

타락죽은 우유를 쌀과 함께 끓여 만든 죽이다. 성질이 약간 차며 겨울철 허약해진 원기를 돕고 비위를 조화롭게 해준다.
소와 말을 키우는 목장을 관리하는 왕실 기관이었던 사복시에서는 날이 쌀쌀해지는 음력 10월 1일부터 소의 젖을 짜서 타락죽을 쑤어 그 다음해 정월까지 임금에게 진상하였다. 당시는 소젖의 생산량이 극히 적었기에, 짠 우유를 그대로 마시지 못하고 쌀과 함께 끓여 죽의 형태로 만드는 방법으로 양을 늘려서 섭취했다. 임금은 타락죽 중 일부를 아끼는 측근들에게만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양반이라 하더라도 우유를 쉽게 맛볼 수 는 없었다.
보통 임금의 수라는 수라간에서, 간식은 생물방에서 담당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타락죽을 쑤는 과정은 내의원 소속 어의가 특별히 관장하였다. 왕실 의료를 담당하던 내의원에서 타락죽을 직접 관리할 정도였으니, 우리 선조들은 타락죽을 단순한 음식이 아닌 약으로 여긴 것이 아닐까? 타락죽을 좋아하며 자주 찾았던 임금은 19대 임금 숙종과 21대 임금 영조이다.
두 임금은 타락죽을 즐겨 먹기도 했지만, 우유를 생산하는 젖소의 생명 또한 긍휼히 여겼다. 특히 숙종은 20대부터 화병을 앓았고, 중년 이후 창(부스럼)과 간병으로 고통받았는데, <승정원일기>를 보면 부스럼이 심한 곳에 고약을 바르고 아침 기상 후 타락죽을 먹는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병이 깊어졌을 때는 구역감이 심해져 음식을 넘기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타락죽만 조금씩 자주 먹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녹두죽, 조선의 해열제이자 진통제

녹두는 <동의보감>에 ‘성질이 차고 맛이 달며 독이 없다. 약물에 중독된 것을 해독시켜주고 열을 내리고 부은 것을 가라앉히며 당뇨를 멎게 해준다’고 적혀있다. 해열제나 진통제가 없었던 조선시대에 선조들은 녹두와 쌀을 함께 끓여 만든 녹두죽을 약으로 활용했다. 인조 14년(1636년) 12월 친명배금 정책에 반감을 가진 청나라가 조선을 침입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인조는 방어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남한산성으로 급히 피난을 갔다. 부상을 당해 피를 흘리는 병사들은 술을 달라 아우성이었다. 인조 14년 12월 25일 충신 허계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술 대신 녹두죽을 쑤어 나누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며 전쟁 속에서도 녹두죽을 준비했다. 영조는 이복형인 경종을 독살하고 보위에 올랐다는 의심을 받았기 때문에 재위기간 내내 누군가 자신을 해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였다. 그러다 곧 그가 우려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영조 6년(1730년) 4월 15일 강도가 궁궐의 담벽을 넘어 화약을 훔쳐 방화를 저지르고 영조를 암살하려 했던 것이다. 가뜩이나 까다롭고 예민한 영조는 이 사건 이후 며칠 째 심장이 두근거리고 입맛이 사라져 끼니를 챙기지 못했다. 이에 신하들이 녹두죽을 복용하길 권하게 된다.
숙종 19년(1693년) 2월 1일 당시 세자였던 경종의 좌측 턱과 뺨이 붓기 시작했다. 이는 현대의 유행성 이하선염으로 보이며, 어의들은 밥을 먹지 못하는 세자에게 녹두죽을 권했다. 이 밖에도 왕실에서 임금이 승하하면 왕대비, 대비, 중전, 세자, 세자빈 등은 식음을 전폐한다. 몸과 마음이 상한 유가족들을 위해 신하들은 식사 대신 녹두죽을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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