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차 한 잔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는 자리였다. 왕의 건강이 곧 국가 그 자체이고, 때문에 왕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정리. 편집실 참고도서. 역사 선생님도 가르쳐주지 않는 조선왕조 건강실록
병약하여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았던 현종은 특히 종기로 고생한 왕이다. 현종의 종기는 얼굴에 나서 없어졌다 싶어 한숨 돌리고 나니, 이번에는 넓적다리에 생기는 식이었다. 현종 10년(1669년)에 이르러서 턱 아래에 또다시 종기가 생겼다. 이번에는 매우 심해서 침으로 종기를 터뜨리자 한 되, 즉 1.8리터 정도의 농이 나왔을 지경이었다. 의관들은 농이 잡히는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서 기를 보하고 열을 내리는 치료법을 사용했다. 이와 동시에 11월부터 해가 바뀌도록 계속해서 인삼차를 마시게 하였다. 이후에도 종기가 계속되자, 농을 없애는 데 효과가 있는 황기를 함께 넣어 달인 황기인삼차로 바꾸어 지속적으로 마시게 했다.
인조 3년(1625년) 2월 16일 <승정원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모든 약재 가운데 가장 많이 쓰이기로는 인삼이 거의 진피, 감초와 차이가 없습니다. 전부터 매번 부족한 것을 근심하여 관청에서 값을 지급하고 무역하여 근근이 잇대어 써왔습니다. 그런데 근년 이후로 공물의 수량이 반 이상이나 줄어 현재 있는 것이 부족하니, 매우 염려됩니다.”
그만큼 왕실의 인삼 사용량이 많았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인삼차의 복용이 큰 일조를 한 것이 분명하다. 왕실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차 중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인삼차다. ‘인삼’이라고 하면, 흔히 허약한 사람들에게 기운을 북돋아주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실제로 숙종은 ‘몸이 노곤하게 피로하면서 열이 나는 것 같고, 배가 그득하며 가슴이 답답한 느낌’에 인삼차를 오랫동안 마셔왔다. 왕과 왕비, 세자에 이르기까지 왕실 가족 누구나 시시때때로 인삼이 들어간 차를 마셨으니, 인삼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만도 했겠다.
왕실에서 차를 처방하는 가장 흔한 증상은 갈증이었다. 대신들은 왕이 차를 마신다고 하면, 으레 갈증에 생기지 않았나 하고 짐작하기도 했다. 현대의 당뇨와 유사한 소갈(消渴)의 흔한 증상이 갈증이다.
조선시대 많은 왕들이 소갈병을 앓았기 때문에, 갈증을 그냥 넘기지 않고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증상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갈증을 호소하는 왕에게 탕약보다는 편하게 마실 수 있고, 물보다는 더 근본적으로 갈증을 치료할 수 있는 차를 처방했다. 그 중 하나가 오미자차이다.
오미자차는 별다른 증상이 없어도 평소에 마실 수 있는 차였다. 인조 11년(1633)에는 ‘별다른 증상은 없으나, 노쇠가 심하여 정신이 맑지 않고 속에서 열이 나며 갈증이 시시 때때로 있을 때’ 오미자차를 연속해서 올린 기록이 있다. 영조의 경우에는 신하들이 음주를 자주하는 것을 걱정하자, “오미자차를 마시고 있다”는 대답을 한 적도 있었다.
왕실에서 마시는 차의 종류는 매우 다양해서 <승정원일기>를 통해 지금까지 연구된 것만 해도 거의 145종에 이른다. <승정원일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차는 금은화차이다.
열이 나거나 갈증이 있는 증상에 열을 내리는 효능이 있는 금은화차가 사용되었다. 귤피와 건강으로 달인 귤강차, 행인과 길경 등으로 달인 행길차, 씨앗 성분의 호도차 등은 기침 증상에 사용되었다.
체한 증상에 신곡차, 산사차 등을 사용하고, 복통이나 설사에는 두시차 등을 이용하였다. 잇몸이 부으면서 치통이 있는 경우에 세신차를 마셔 효과를 보거나, 계속해서 땀을 흘리는 증상이 있을 때 땀을 막아주는 효능의 부소맥차를 마셨다. 이렇게 한 번쯤 흔하게 앓고 넘어가는 증상에 대해서 다양하고 많은 차들이 적절하게 응용되어 왕실 사람들의 건강을 챙겼다.
왕실의 ‘차’는 의사가 처방하는 ‘약’이었다. 종기를 치료하면서 마신 인삼차처럼 보조적인 치료약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혹은 목마를 때 마신 오미자차처럼 탕약을 처방할 만큼 심하지 않는 가벼운 질환이나 평상시 건강관리 차원에서 마시기도 했다.
증상과 목적에 맞는 차를 적당량 마셔야 한다는 생각, 이것이 조선 왕실에서의 차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왕실에서의 차는 환자의 증상과 상태를 모두 살핀 주치의의 처방전이었다.
차 처방은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증상에 맞게 약재를 더하거나 빼고, 다른 차 처방을 합쳐서 만들기도 했는데, 이것은 왕실 의원의 일이었다. 들어가는 약재가 같다고 같은 처방이 아니라, 약재의 용량까지 고려하는 세심함을 보였다.
차 한 잔의 처방을 위해 이것저것 다 신경 쓰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왕실 의원은 분명 머리 아픈 직업이었을 것이다. 왕실 의원이야 말로 두통과 심신의 이완을 위해 자신에게 맞는 차 한잔의 여유가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