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우리는 ‘분노’라는 것을 꽤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검색창엔 항상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그 중 상당수는 우리가 분노할 대상이기도 하다. 실컷 욕을 할 수 있는 사람들 말이다. 내가 아닌 타인, 행복이 아닌 화에 집중하고 있는 삶, 과연 괜찮은 걸까?
글. 정신건강의학과 이정석 교수
얼마 전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서울 한 모텔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던 사람이 투숙객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해서 유기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범인이 경찰에서 밝힌 살해 동기는 끔찍했다. “나보다 어려 보이는 사람이 ‘모텔비 얼마야?’, ‘사장 어디 있어?’ 같은 반말을 했다. 얼굴을 향해 담배 연기를 내뿜어 모멸감을 느꼈다”는 이유로 그랬다는 것이다. 지난해에도 자기 자리를 안 치워준다는 이유로 손님이 PC방 아르바이트생을 살해하는 사건이 있었다.
사람은 때로는 분노하고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런 감정을 적절한 방법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끔찍한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위와 같이 심각한 사건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주위에서 분노에 계속 몰두하고 아주 작은 일에도 쉽게 화를 내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40세 박모씨는 직장 내에서 화를 잘 내기로 유명했다. 부하직원들이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따끔하게 혼을 내서 일을 빨리빨리 처리하곤 했는데 얼마 전부터 팀원들이 하나 둘씩 관두더니 결국 상무님에게 “아랫사람들 그만 들볶아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자기 노고를 알아주지 않는 것에 화가 나 상무님에게도 소리를 지르며 대들었더니 얼마 뒤 팀장에서 물러나라는 통보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자신의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 ‘저 사람은 분노조절장애인가?’하고 생각하곤 하는데 사실 ‘분노조절장애’라는 병은 정신건강의학과에 없다. 분노조절장애와 가장 비슷한 정신건강의학과 질환은 ‘간헐성 폭발장애’인데 이 질환에 해당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우리가 생각하는 분노조절장애 환자들은 많은 경우 화를 분출하는 게 일종의 ‘정신적 습관’이 되어버린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분노조절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많은 이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첫째,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화를 내게 되는지 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경우 화를 내는 것이 너무 습관이 되다보니 자신이 화를 내는 것인지도 모르고 무심결에 지나가는 수도 있다. 그래서 하루하루 일상생활을 하면서 내가 언제 화가 나는지 돌이켜보고 주위의 가족이나 친구, 직장동료들에게 내가 어떤 상황에서 화를 내는지 물어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스스로 화가 나는 상황들을 돌이켜보다 보면 왜 자꾸 화가 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너무 바쁜 일상 속에서 ‘이상한 사람들 때문에 자꾸 화가 나게 돼’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상황들을 잘 살펴보면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상황들을 오해해서 자꾸 화를 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둘째, 일단 화가 난 경우에는 그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 많은 경우 화가 나는 상황에 접하게 되면 이성이 손을 쓸 겨를도 없이 화를 분출하게 되곤 한다. 또 많은 경우에 상대편도 화가 난 사람에게 곱게 말하지 않게 되는데, 그런 경우에서 이성을 붙잡고 화를 가라앉히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선 머릿속에서 이성이 분노를 이길 수 있을 때까지 그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다. “조금 있다가 이야기해봅시다”라며 잠깐 타임아웃을 갖거나 계속 갈등이 있는 사람과는 아예 만날 기회를 줄이는 게 좋다.
셋째, 화를 건강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연습해야 한다. 누군가 자신을 무시하거나 얼토당토아니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에 꼭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질러야 되는 것은 아니다. 차분히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거나 자신이 어떠한 이유로 이런 감정 상태에 도달했는지 설명해주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도 쌓아두면 폭발하게 되므로 그때그때 표현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넷째, 나를 위해서 ‘그 사람’을 용서할 필요가 있다. 사람이 살다보면 친구, 지인, 가족, 동료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하곤 한다. 너무 화가 나서 어떻게 하면 ‘그 사람’한테 복수를 할까 고민하며 밤을 지새우곤 하지만 법치국가인 현실 대한민국에서 ‘그 사람’한테 속 시원하게 복수할 방법은 사실 마땅치 않다. 복수만 생각하다가 결국 스스로의 정신건강만 나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과거라는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용서가 필요한 것이다.
다섯째, 내 삶에서 즐겁고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 ‘분노’에만 집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내면의 행복과 평화를 찾기 위해 일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찾아보는 과정이 필요한 이유다. 무척 바쁜 일상이지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다보면 ‘분노’에 투자하게 되는 시간도 줄어들 수 있다.
부처님 말씀에 “분노하고 있는 것은 상대방에게 던지려고 손에 뜨거운 숯 덩어리를 잡고 있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가 있다. 계속 화를 내게 되면 주위 사람들도 힘들지만 가장 힘든 것은 부정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스스로일지도 모른다. 요즘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게 느껴진다면 혹시 내가 ‘분노’에만 빠져서 다른 것들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