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영역
Culture & News
TRAVEL
일산병원 재활치료센터 하치심 기사장과 이명완 할머니
영혼의 벗과 함께 여행하는
인생길의 맛과 멋
진정한 사랑이 그러하듯 참된 우정은 힘이 세다. 그것은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는다.
32년 이라는 나이 차, 다른 삶의 이력이 두 사람의 우정에는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17년 째 우정을 이어오고 있는 두 사람은 서로 존재자체가 감동인 ‘영혼의 벗’이다.
글. 박현숙 사진. 이서연(아자 스튜디오)
벗을 위한 정성, 시작은 있되 끝은 없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맛있는 냄새가 집안에 가득했다. 얼굴에 수줍은 홍조를 띤 채 식탁으로 안내하는 이명완 할머니의 손을 잡고 하치심 씨는 “아이고, 할머니! 내 이러실 줄 알았어요, 날도 더운데 이렇게 많은 음식을 하셨어요?”라며 송구스러워 했다. 이명완 할머니는 “선생님, 힘들지 않았어요. 즐거운 걸!”이라고 화답하며 맞잡은 벗의 손을 다독여주었다. 86세의 이명완 할머니와 54세의 하치심 씨, 두 사람은 도대체 무슨 사이냐고 장난스럽게 묻자 이명완 할머니는 “아끼고 사랑하는 친구죠!”라며 봄 햇살처럼 환한 웃음을 지었다.
물살을 역류하는 연어처럼 세월의 흐름쯤이야 거뜬히 뛰어넘는 친구와의 점심식사를 위해 할머니가 차린 식탁은 수라상이 부럽지 않았다. 잡채, 오이선, 해물냉채, 산적, 잘 익은 열무물김치와 어제 새로 담근 양배추 김치, 양지육수국수, 샐러드, 오미자 화채가 탄성을 자아냈다. 그 식탁에 하치심씨가 만들어온 족편이 올랐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손도 많이 가는 음식이다. 한 가족의 살림을 꾸려가는 주부이자 일산병원 재활치료센터에서 기사장을 맡고 있는 직장인인 그는 어젯밤 자는 시간을 덜어 내 족편을 만들었다.
“우족을 다섯 시간 반 정도 끓여서 만들어요. 우리 이명완 할머님이 궁중음식을 전수받은 분이라 배운 거예요. 우족은 영양가도 높고 씹는 맛이 부드러워서 어르신이 드시기 좋죠. 내일 우리 할머님이 70년 동안 사귀어 오신 친구 분들과 모임이 있다고 하셔서 가져가시면 좋겠다 싶었어요. 좀 넉넉히 해왔죠.”
벗의 마음을 잘 아는 이명완 할머니는 특유의 수줍은 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우리 하치심 선생님은 신여성인데 속엔 옛날 사람이 들어있어요. ‘따스하고 단정한’”이라고 했다.
“전에 저희 집이 이사할 때 할머니께서 팥죽을 푸짐하게 쑤어서 이사하는 집 네 귀퉁이에 뿌리시며 액운을 막고 복을 빌어주셨어요. 할머니는 그런 분이에요. 상대를 위한 정성에 만족이나 끝이 없는 분! 옛 어르신들의 삶의 지혜와 지극한 사랑을 할머니로부터 배우죠.”
하치심 씨의 말에서 ‘따스하고 단정한 옛날 사람’은 두 사람의 교집합임을 알 수 있었다.
아름다운 곳을 보면 그대가 생각나기에
2000년 초엽, 두 사람은 같은 아파트의 앞 뒤동 이웃으로 알게 되었다. 당시 하치심 씨의 딸과 이명완 할머니의 손자가 초등·중학교 동창인 것도 가까워지는 데 일조했고 일산병원의 재활치료사와 물리치료를 받는 환자로도 인연을 맺었다. 두 사람이 각별한 사이가 된 데에는 하치심 씨의 적극성이 있었다. 요즘 젊은이 못지않게 젊고 세련된 감수성에 반하여 하치심 씨가 다가갔다고 한다. 특히 사람에 대해 관심이 많고 어려운 사람을 지나치지 않고 돕는 모습은 고향의 친정 어머니를 그대로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13대 종부로 살아오시며 이웃에 음식 인심이 후하고 많은 사람을 품는 넉넉한 사랑을 가르쳐 주신 이명완 할머님을 이웃으로 만난다는 건 아름다운 선물이었다. 하치심 씨는 “내가 더 사랑해요!”라며 웃음 지었다.
성숙한 사랑은 더 사랑한다고 해서 외롭지 않다. 더 사랑하는 만큼 행복하다. 할머니가 낯선 곳이 주는 생기를 좋아하는 것을 알다보니 출장을 가거나 해서 아름다운 곳을 알게 되면 할머니를 모시고 함께 가족여행을 떠나곤 한다.
“이 늙은이를 어디든지 데려가세요, 우리 하 선생님은! 덕분에 진도에선 바닷길이 열리는 광경도 봤지요. 아, 얼마나 근사했는지! 송추처럼 가까운 곳에도 같이 자주 가고 발리여행도 다녀왔어요. 내가 옛날 사람이라 턱 마음을 표현하지 못할 뿐이지, 나도 하 선생님을 참 아낀다오. 하하!”
지난 2월에 두 사람은 목포, 광주, 진도로 2박 3일간 여행을 다녀왔다. 요즘 들어 할머니의 식사량이 줄어서 마음이 쓰였던 하치심 씨는 할머니가 목포에서 낙지전골 한 대접을 다 비우시는 모습을 보고 참 기뻤다고 한다.
따뜻한 말 한 마디, 공감의 마음 한 조각
일에서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나 어려움을 맞닥뜨릴 때 하치심 씨는 이명완 할머니를 찾아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마음을 다 보여준다고 한다. 그저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치유 받는 느낌이라고 한다. 할머니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그에게 ‘영혼의 약손’인 셈이다. 턱턱 얹히고 쑤시는 마음을 부드럽게 쓸어주고 풀어주는 그것은 바로 “그 마음 다 알아요!”라는 공감의 말이다.
“할머니가 ‘그 마음 안다, 괜찮다, 다 괜찮다’고 하시면 거짓말처럼 마음이 좋아져요. 그러면서 본인의 경험담을 들려주시죠. ‘그 시절 이런 일을 겪었다, 그렇게 저렇게 한 고비 넘겼다’고 들려주시면 어른의 삶의 지혜가 참 좋다는 생각이 들고요. 일제시대, 한국전쟁 등 어려운 시기를 관통하시면서도 흐트러짐 없이 아름답게 당신의 삶을 가꿔 오신 모습이 제겐 깊은 울림을 줘요. 할머니의 맛있고 정갈한 음식처럼 마음을 움직이는 삶의 태도는 저절로 이루어진 게 아니란 걸 전 알아요.”
이 할머니는 궁중음식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줄 때도 삶의 지혜를 한 수 가르쳐주신다. 예컨대 삶은 족편에 간을 할 때는 너무 굳거나 굳지 않았을 때가 아닌 적당히 굳었을 때여야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인생도 그렇다고 한다. ‘지금’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인생의 ‘때’임을 알고 소중히 여기며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신다. 서로 건네는 웃음만으로도, 맞잡은 두 손만으로도 힘이 되는 사람, ‘영혼의 벗’을 가진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한국전쟁 등 어려운 시기를 관통하시면서도 흐트러짐 없이 아름답게 당신의 삶을 가꿔 오신 모습이 제겐 깊은 울림을 줘요.
할머니의 맛있고 정갈한 음식처럼 마음을 움직이는 삶의 태도는 저절로 이루어진 게 아니란 걸 전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