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봄이 오면 단골 메뉴처럼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복고는 언제까지 지속할까요?”
복고는 영어로 레트로라고 합니다. 레트로(Retro)는 추억, 회상을 뜻하는 ‘Retrospect’의 줄임말이죠. 문화현상을 연구하고 분석하는 일을 하다 보니 언론매체에 종사하는 기자에게서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질문하는 사람들은 다양해요. 대학신문 기자는 물론이고 방송기자, 미래 연구소 연구원에 이르기까지. 복고에 관한 관심은 식을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글 김헌식_대중문화평론가
국내에도 자리 잡은 레트로 감성
헤아려보니 20여 년째 같은 질문을 받습니다. 아마도 봄이 되면 패션이 주목을 받고 그 안에 복고풍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올해도 복고에 관한 취재와 질문이 이어질듯합니다. 요즘에는 여성 패션 시장을 강타하고 있다시피 한 ‘Y2K 패션’이 화제죠.
복고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 같냐는 질문에 제 대답은 한결같습니다. 즉, 영원히 계속된다고 말합니다. 다만 복고는 고정되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죠. 복고의 내용이 바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1970~80년대가 유행한 듯싶은데요, 이젠 1990년대로 이동했습니다. 급기야 Y2K 패션은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유행한 패션이고요. Y2K는 연도(Year)와 1000(Kilo)의 첫 글자를 딴 말이죠. 1999년 세기말을 두렵게 했던 컴퓨터 버그 해프닝의 이름과도 같아 이름만으로도 세기말과 밀레니엄 시대를 떠오르게 합니다. 이렇게 레트로는 끊임이 없습니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이런 복고의 특징을 잘 파악하고 실천한 기획 제작자는 박진영이었어요. 2007년 원더걸스를 데뷔시킨 박진영 JYP 프로듀서는 복고 콘셉트를 전면에 내세웠죠. 원더걸스는 미국에도 진출해 복고 열풍을 일으켰어요. 노래 ‘노바디’의 음악이나 의상이 1970년대 복고풍이라는 점이 미국 대중에게 크게 어필했죠. 박진영 프로듀서는 “레이디 가가가 복고풍이긴 하지만 원더걸스와는 차별화된다”라고 자신감 있게 말하기도 했고요. 당시 국내 걸그룹으로는 빌보드 최고 순위를 기록했죠. 구체적으로 ‘드림걸즈’를 연상케 하는 1970~80년대 미국 클럽 가수의 복고풍 의상을 차용해 큰 반향을 일으켰죠. ‘Tell me’ 역시 이른바 ‘찌르기 춤’과 ‘어머나 춤’으로 복고 열풍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어요. 박진영 프로듀서는 레트로 스타일이라는 말을 썼는데, 복고는 일정하게 순환되어 나타난다고 봤어요. 복고가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를 잡는다는 점을 그는 일찌감치 간파했던 것이죠. 최소한 미국에서는 이런 복고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을 본격적으로 국내에서 확인하기 어려웠는데 그것을 시작한 것이 원더걸스였죠.
드라마에서는 2012년 무렵 복고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응답하라 시리즈’였죠. 줄여서 ‘응사’라고 불렀어요. 1990년대 팬덤 문화를 소재로 한 <응답하라 1997>(2012년)을 시작으로 서울 신촌 하숙집을 배경으로 한 <응답하라 1994>(2013년), 쌍문동 골목길 다섯 가족을 배경으로 한 <응답하라 1988>(2015년)까지 연이어 제작되었고 반응은 폭발적이었죠. 이 드라마를 보면 1990년대와 1980년대를 오가면서 옛 추억을 불러일으켜서 확실히 한국에도 레트로 감성이 자리를 잡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과거에 대한 미련 혹은 회한?
그렇다면 왜 레트로 열풍이 일어날까요. 단순히 과거에 대한 미련과 회한 때문일까요? 이렇게 레트로 콘텐츠가 계속 사람들 사이에서 추억되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감성팔이’를 한다는 비판도 있는 게 사실이죠. 예전에는 과거의 콘텐츠를 즐기는 사람들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과거의 기억에 머물고 있으므로 퇴행적이라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무드셀라증후군(Methuselah syndrome)’이라는 말로 부정적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는 지나간 기억을 아름답고 긍정적으로 왜곡하는 현상을 말해요. 물론 과거의 그 시절에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그러므로 모두 좋았던 시절이라고 말하는 복고 콘텐츠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과거를 회상하는 콘텐츠를 자꾸 접하는 것은 행복과 즐거움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도 합니다. 이러한 점은 현대 의학으로도 빈번하게 증명되고 있습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연구팀은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면 우울증 예방에 도움을 준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탄력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탄력성은 힘든 상황을 극복하는 능력을 말하지요.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고도 해요. 힘든 상황에 빠져도 그것에 좌절하지 않고 극복할 힘을 준다는 것이죠. 지금 닥친 어려운 일을 극복하게도 하지만 아울러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합니다. 영국 사우샘프턴대학 팀 와일드슈트 박사 연구팀에 따르면 향수(鄕愁)는 자아존중감을 높여서 낙천적으로 만든다고 해요. 실험 참가자들에게 과거 향수를 떠올릴 만한 노래와 평범한 곡을 무작위로 들려주었는데요. 그랬더니 평범한 곡보다 향수 어린 노래를 들은 사람들이 오히려 미래를 더 낙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소속감과 위안, 격려를 받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가족들과 관련한 레트로 콘텐츠라면 더욱더 좋을지 모릅니다.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연구팀이 코마에 빠진 사람 15명에게 6주 동안 하루 4번 가족과 관련된 추억을 녹음해 들려줬어요. 추억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코마에 빠진 사람들의 의식이 어떻게 변화할지 궁금해졌죠. 그래서 MRI로 촬영했더니, 기억과 언어에 관여하는 뇌 부위 활동이 증가하는 점을 관찰할 수 있었어요. 의식이 없는 사람도 이러한데 일반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효과가 있을 것이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지요. 특히 한국 사람들은 가족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니 더욱 그럴 것입니다.
레트로 콘텐츠는 젊어지게도 합니다. 하버드대 심리학과 연구팀은 추억 연구에 참여할 70~80대 16명을 모집하고 일주일간 조용한 수도원에서 동년배끼리 옛날얘기를 나누게 했죠. 수도원은 20년 전 영화·유행가·TV 프로그램·시사잡지·가구로 가득 채웠습니다. 일주일 뒤 검사를 해보니 모두 체중·민첩성·기억력·지능이 모두 상승했습니다. 그런데 차이가 나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젊어진 정도였어요. 조건이 있었지요. 한 그룹은 자기소개서에 예전 젊은 시절의 사진을 붙이고 현재형으로 말하게 했고 다른 한 그룹은 지금 주름살이 있는 사진을 붙이고 과거형으로 말하게 했습니다. 이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젊어졌을까요. 눈치 빠르신 분들은 이미 짐작했겠지만, 젊은 날의 사진과 현재형으로 말한 사람들이 더 젊어졌어요. 레트로라고 해서 단순히 과거에 머물러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그렇게 여기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레트로 스타일의 패션이나 콘텐츠는 삶을 좀 더 능동적으로 만들고 열정과 에너지를 불어넣어 준다고 볼 수 있겠죠. 이는 연구실험에서도 증명이 되었어요. 엘렌 랭어(Ellen Langer) 하버드대 교수에 따르면 입는 옷에 따라 병원에 가는 횟수가 달라졌는데, 특히 유니폼을 입는 사람들에게 질병이 덜 생겼다고해요. 옷을 입을 때마다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욱 건강이 나빠진다고 하죠. 그렇다면 젊은 날의 옷을 입는 것은 나쁘지만은 않겠네요.
그렇다면 얼마나 추억에 빠지는 것이 좋을까 싶은데요. 미국 시카고로욜라대 심리학과 프레드 브라이언트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의 연구 결과는 하루에 20분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추억에 잠기면 1주일 전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아울러 현재의 삶에 대해 생각할 때보다 더 행복감이 늘었다는 것이죠. 그때마다 느낌을 적으라는 전문가도 있지만, 오히려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이 더 좋다고 해요. 이런 내용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리버사이드 캠퍼스의 심리학과 소냐 류보미르스키 교수의 연구에서 증명되었지요.
중요한 것은 레트로의 현재화
그런데 옛날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시절은 언제일지 궁금해집니다. 대체로 레트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예전 콘텐츠를 보면 주로 젊은 날이 많은데 말입니다. 단지 젊은 날의 레트로 감성과 콘텐츠를 불러일으키면 되는 것일까요? 2014년 뉴햄프셔대학교 심리학과 크리스티나 스타이너(Kristina Steiner)의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 사람이 초기 성인기인 25세 이전의 경험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좋은 기억이라고 여겼다고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노년층이 15~17세에서 30세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죠. 청소년기와 초기 성인기에 일어난 일들을 매우 또렷하게 많이 기억하는 현상을 ‘회고 절정(Reminiscence bump)’이라고 합니다. 좀 어려운 말이죠. 청소년기와 초기 성인기에 관해 또렷하게 기억하는 현상, 이런 현상이 많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체로 이 시기가 정서적으로 예민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처음으로 겪어야 하거나 겪은 일이 많고 이것이 정체성과 자의식을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특정 나이가 되면 이런 젊은 날의 기억이 확연하게 또렷해지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젊은 날의 기억이 또렷해지는 것은 몇 살부터일까요.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35세 전후라고 합니다. 즉, 35세가 되면 25살 즈음의 좋았던 옛날 기억이 더욱 생각난다는 것이죠. 아무래도 이때부터 자신의 좋았던 날을 추억할 수 있는 레트로 콘텐츠를 떠올리게 되는 듯해요. 30대 중반 이후부터 사람들은 사회에 진출하여 자리를 잡기 시작하고 경제적인 수준도 점차 확립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구매력을 갖게 되고 의사결정권들을 갖게 되면서 10여 년 전에 경험했던 레트로 스타일이 소비 현상을 일으키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더욱 레트로 스타일이 확산될 것입니다. 그들이 사회적인 영향력을 갖게 된다면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새로운 세대가 다시금 이런 위치에 이르면 레트로의 내용은 달라질 것입니다. 그것이 레트로가 지속하는 가운데 변화하는 이유입니다.
이제 레트로 현상의 방향성을 정리해볼까요. 앞서 하버드대학의 실험에서 알 수 있었듯이 레트로 스타일의 현재화가 중요합니다. 예컨대 예전에 전성기를 누렸던 가수들에게 옛노래만 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스타일은 예전에 머물지 않으면서 언제나 뉴트로(Newtro)해야 합니다. 뉴트로는 단순히 예전의 복고 콘텐츠나 물품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트렌드에 맞게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젊은 층도 좋아할 수 있고 기성세대도 젊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레트로의 현재화, 잊지 마세요.
# 김헌식
문화정보콘텐츠학 박사로 평소 문화심리치유에 관심이 많아 관련 방송 매체에 고정 출연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대중문화심리읽기』, 『의외의 선택, 뜻밖의 심리학』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