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으며 세계와 이어져 있다. 또 인간은 날줄로는 다른 인간과 잇기 위해 살고 씨줄로는 대를 잇기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녀 간의 사랑도 DNA를 잇기 위한 본능에 기인한 것으로, 이처럼 인간은 잇기 위해 산다.
글 구승준 번역가 · 칼럼니스트 / 사진 송인호
세상과 나는 태초부터 이어져 있다
양자물리학에서는 세상 만물을 각각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이어진 하나로 본다. 유력한 가설로 여겨지는 빅뱅이론에 따르면 애당초 우주는 어떤 한 점으로 탄생했으며 대폭발로 팽창하여 오늘날의 우주에 이르렀다. 빅뱅(Big-Bang) 이전에는 공간도 시간도 물질도 존재하지 않았는데, 빅뱅 이후에 창조됐다는 것이다. 무(無)에서 시작하여 10~33cm밖에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작은 우주가 갓 태어나고, 거기에서부터 삼라만상이 전개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데서 어떻게 물질이 생겼는지를 생각하면 불가사의한 일이다. 마치 마술사가 모자에서 토끼나 비둘기를 꺼내듯 물질을 창조했다는 것인가?
최근에 그 답을 찾아냈다. 우리가 고정된 개체라고 여기는 물질이 사실은 ‘끈의 진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우주의 모든 물질과 힘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한 가지 끈이 다른 양상으로 진동하는 것에 불과하다. 인간도 토끼도 볼펜도 모두 파동이며, 그 실체를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자연은 하나의 통일된 존재다. 만물은 텅 비어 있는 가운데 오로지 파동만 존재한다. 그런 이유로 불교에서는 양자물리학에서 밝혀낸 우주관이 불교의 공(空) 사상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삼라만상이 이어져 있음은 인간의 존재방식에서도 증명할 수 있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으며, 세계와 이어져 있다. 예로부터 동양의 세계관에서는 천지인(天地人)이라고 해서 하늘과 땅 사이에 인간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하늘(공기)을 마시고, 땅(땅의 음식)을 먹는다. 숨을 쉬고 음식을 먹는 행위가 없다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세상과 인간은 이어져서 존재하며,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다. 이는 애당초 우주가 태동할 때 작은 점 하나에서 인간의 씨앗을 지닌 채 태어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잇기 위해 산다
인간은 인간끼리도 서로 이어져 있다. 이는 인간의 대뇌피질이 지닌 특성에서 알 수 있다. 인간의 뇌는 파충류나 포유류와 달리 호흡이나 심장박동 등 생명활동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더 높은 능력을 갖고 있다. 특히 인간의 뇌가 지닌 가장 큰 특징은 정교한 언어활동에 있다. 그런데 언어능력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인간이 있어야 가능하다. 인간은 다른 인간과 함께 살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인문학 전반에서 널리 차용되는 매슬로(Maslow)의 욕구단계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의 욕구를 충족하고 나면 다음 욕구를 충족하려고 한다.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애정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순이다. 그런데 이 모든 욕구 중 타인과 관계되지 않은 것은 없다. 생리적 욕구에는 식욕이나 성욕이 포함되는데, 이는 종족을 잇기 위한 인간의 본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애정의 욕구 또한 가족을 형성해 집단에 귀속되고 싶은 인간의 욕구다.
인간은 날줄로는 다른 인간과 잇기 위해 살고 씨줄로는 대를 잇기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속성을 드러내는 한 가지 예를 살펴보자. 대략 기원전 8세기경, 로물루스는 로마를 건국한 후 한 가지 난제에 봉착했다. 국가를 유지하려면 국민이 자식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하는데, 당시 로마에는 여자가 없었다. 그는 이웃 국가들의 여성과 로마 남성이 결혼할 수 있도록 여러 차례 협상을 벌였지만, 모두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는 한 가지 궁여지책을 생각해냈다.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바다의 신인 넵튠 축제를 열고 북쪽 이웃인 사비니족을 초대했다. 축제가 무르익을 무렵 로물루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었다가 다시 입었다. 그러자 로마인들을 칼을 뽑아들고 사비니족 남자들을 위협하여 쫓아내고 그들이 데려온 아내와 딸들을 납치했다.
분개한 사비니족은 훗날 로마를 급습했다. 전투는 몇 차례 더 벌어졌지만 어느 한쪽으로 판세가 기울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 사비니족의 여인들이 울면서 두 군대 사이에 뛰어들었다. “로마인은 이미 남편이 되었다. 한편은 아버지나 오빠고 한편은 남편이니 누구도 죽게 놔둘 수 없다. 싸움을 멈춰달라”고 호소했다. 양쪽은 극적으로 화해했으며, 사비니족은 아예 로마로 이주했다. 이 이야기는 비록 신화지만 DNA를 이어나가는 일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인간의 수명은 한정적이다. 자신이 죽고 나면 자신과 최대한 닮은 인간을 복제하기 위해 DNA를 남기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이다. 자식은 얼굴 생김새나 성격, 심지어는 질병까지 부모의 형질을 물려받는다. 육체적 특성뿐만 아니라 성격이나 경험이 유전된다는 학설도 신빙성을 얻고 있다. 최근에는 유전자 검사를 통해 아직 드러나지 않은 병변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일산병원에서도 유전자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다.
남녀 간의 사랑은 DNA를
잇기 위한 설계된 본능
낭만을 깨는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남녀 간의 사랑도 DNA를 잇기 위한 본능에서 기인한다.
남녀가 서로 눈이 맞으면 이른바 ‘콩깍지’가 씌여 모든 모습이 사랑스러워 보이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꼴 보기 싫은 모습으로 바뀐다. 미국 럿거스대학의 헬렌 피셔 교수는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뇌활동을 연구하고 남녀 간의 사랑이 ‘갈망’, ‘홀림’, ‘애착’ 3단계를 거치며 단계마다 뇌에서 분비되는 화학물질이 달라진다고 발표했다.
갈망 단계에서는 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나 에스트로겐, 도파민이나 아드레날린을 분비한다. 이 호르몬들은 상대를 갈망하고 가벼운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 홀림 단계가 되면 페닐에틸아민(PEA)이 분비되는데, 이것은 마약성 약물인 암페타민과 매우 유사한 분자구조를 지닌다. 마치 마약을 찾는 것처럼 상대를 갈구하며, 이성적인 인지기능이 떨어지고 감정적인 흥분과 긴장에 도취된다. 애착 단계가 되면 PEA 분비가 감소하고 옥시토신 분비가 늘어난다.
옥시토신은 행복할 때 나오는 세로토닌 분비를 돕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나오는 코르티솔 분비를 억제해 긴장감을 풀어준다. 옥시토신은 사람에게 진정과 안정, 포용을 느끼게 해 ‘모성애’ 호르몬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가슴 떨리는 사랑은 없지만 서로를 편안하게 여기는 것이다.
미국 코넬대학교 인간행동과학연구소의 신시아 하잔 교수는 전 세계 5,000명을 대상으로 사랑의 유통기한에 대해 연구했고, 대략 18개월에서 30개월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 기간이 끝나면 더는 PEA가 분비되지 않는다. 이 밖에도 세계적으로 여러 연구가 있지만 사랑의 유통기한은 4년을 넘기기 어렵다고 한다.
이는 인간의 진화 관점에서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남녀가 이성을 잃고 서로를 탐닉해야 임신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아기가 태어나거나 아기가 자라고 있을 무렵 비이성적인 호르몬의 분비가 중단된다. PEA가 계속 분비된다면 아기는 내팽개친 채 정신이 나가 서로에게 몰입하여 인류 역사는 계속 이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시기에 애착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분비되는 건 매우 합리적인 듯하다. 정신을 차리고 서로를 편안하게 여겨야 아기를 잘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옥시토신은 출산 후의 여성에게서 분비되는 호르몬이기도 하다. 옥시토신으로 인해 엄마는 아기에게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이렇게 인간은 계속 대를 이어 살아가고 있다.